어느 민족이건 모두로부터 추앙받는 영웅이 있다. 베트남도 예외 일 수 없는데 그중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은 호찌민(또는 호치민, 이하 호찌민으로 통일) 일 것이다. 그는 유네스코로부터 공인받은 세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이기도하다.
호치민은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의 정신으로 대했다. 그의 철학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이른바 "바(3) 꿍(함께) 정신"이다. 호찌민의 일대기 자체가 현대 베트남의 역사이며, 지금의 베트남을 움직이고 있는 동력이 바로 그의 사상이다. 유네스코에서 1990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호치민을 '베트남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문화인'으로 공인한 이유이기도 하다.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애국, 애족, 애민 사상으로 무장하여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통일의 화신이라고 여긴다.
생전에 무려 174개의 이름을 사용한 호치민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중북부의 응에안성 남단현 낌리엔리 샌 마을에서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의 생가는 침대와 베틀이 고작이고 텃밭에는 고구마가 울타리엔 코코넛 나무 몇 그루 가 전부인 초라한 농가이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호찌민의 성이 '호'이고 이름을 '치민'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호찌민은 그가 생전에 사용한 수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 일 뿐이다.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응우옌'이 원래 그의 성이며 11살에 '응우옌 떳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그 후 독립운동 시기에 프랑스인들의 눈을 피해 수시로 이름을 바꿔야만 했는데, 1969년 그가 죽기까지 사용한 이름이 무려 174개나 된다고 한다.
호찌민은 1942년 8월 27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광시성에 갔다가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었을 때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에 기재되어 있던 이름이다. 이를 계기로 호찌민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수 많은 이름가운데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사용한 이름이 된다. 베트남에서는 모두 끝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는데, 호찌민 만이 유일하게 성으로 불리운다. 베트남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해외서 독립운동
호찌민은 11세에 모친(호앙티로안)을 잃는다. 그의 부친(응우옌신삭)은 조선에서 동학운동이 일어나던 1894년 과거시험에 합격해 프랑스 식민청의 고위관리가 된다. 그러나 벽지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프랑스 법을 어긴 동포를 관대히 처분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당하는 일을 겪게되었다. 프랑스 식민시대 관료제도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자식들에게 정규교육을 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중학교과정 졸업이 호치민의 최종 학력이라고 한다.
그 후 호치민은 1911년 21세 약관의 나이에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망을 지원해 줄 후원자를 찾기 위해 당시 사이공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 '아미랄라뚜쉬 뜨레빌'호에 무작정 올라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30년간 해외를 떠돌게 되는데 세월만큼이나 그는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된다. 정원사, 미화원, 석탄 화부, 사진사, 모조 화가, 보조 요리사등 생계유지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피지배자의 신분으로 긴 시간 고통을 감내하며 뼛속깊이 민족과 약자들의 아픔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베트남 제1의 도시 사이공이 호찌민으로..
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 30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중심부에 위치한 대통령궁에 북베트남(월맹)기가 게양된다. 사이공 함락의 선봉이었던 북베트남군 제203 기갑여단 소속의 소련제 탱크와 이를 뒤따르던 304사단 보병들이 대통령궁에 진입한 지 45분 뒤의 일이었다.
제네바 협정(1954년)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 들어섰던 베트남 공화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지루했던 베트남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된 순간이다. 비록 호찌민은 마지막 꿈이었던 통일을 목도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사망한 지 6년 만에 그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민족의 영웅을 기리기 위해 베트남의 경제 수도이며 제1의 도시인 사이공이 호찌민으로 탈바꿈 한다.
호찌민의 리더십
우리는 역사의 기록에서 단 하나의 위대한 지도자가 한 나라의 생존과 흥망성쇠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아왔다. 만약 조선에서 서인들의 반정이 일어나지 않아 인조가 아닌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유지됐더라도 병자호란이라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을까?
호찌민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유, 국민의 행복을 위해 바쳤기에 민족의 영웅이자 자부심이 되었다. 동시에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청렴했기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민족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호찌민이 남긴 유물
호찌민은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태국어, 중국어의 3가지 방언을 구사할 줄 아는 국제적 감각을 갖춘 지도자였다. 동시에 그는 베트남이 낳은 문호이기도 하다. 1942년 8월 27일부터 1943년 9월 10일까지 약 1년간 중국 국민당 군부에 의해 중국 광시성 13개현의 18개 감옥을 돌며 수감생활을 하던 중 쓴 133편의 시집(옥중일기)이 있다. 이 옥중일기는 베트남어가 아닌 중국 전통의 당나라 형식에 따른 전형적인 한시의 형태이다.
옥중일기를 통해 감옥에서의 추위나 굶주림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조국만을 생각하는 마음,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사고와 겸손,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2012년 10월 1일 '옥중일기'를 국가보물 제10호로 지정한다. 호찌민은 옥중에서 영양실조로 이가 빠지고 피부병으로 온몸이 울긋불긋하였고 이불이 없어 신문지를 이불 삼는 등의 고통을 견뎌낸 철인이기도 하다.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유산을 남기고 떠난 호찌민.. 호찌민을 이해하는 것은 5천 년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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